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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일을 배워가는 나이든 남편 본문
이제 중년 은퇴 시기를 맞이한 남편
그는 중하지 않으나 꾸준하게 관리해야 하는 면역계통 질병도 있고, 그간 몇번이나 쓰러질 만큼의 힘겨운 회사생활과 공장생활에 충분히 지쳐 재취업은 생각하지 않고 있다. 그 대신 집안일을 도맡아 하고 나중엔 연로하신 부모님을 돌보는 일을 맡기로 했다.
그는 이제 직장인에서 전업주부가 되어 보기로 한 게다.
그러나 성장기에도 그리고 결혼 후에도 (그는 주말부부로 오래 살며 공장 밥 먹고 공장 기숙사에서 살아왔다.) 생전 제대로 된 집안일을 해본 적 없던 남편에게 집안일을 시켜보면 말 그대로
"하~앓느니 죽지. 내가 하고 말지." 수준으로 어설펐다.
그는 그 어설픔을 핑계로 "스리슬쩍 안하고 넘어가려는 성향"이 있음을 이미 잘 알기에, 나는 대신 해주거나 포기하지 않고 답답함을 견디며 차근차근 가르치는 중이다.
한편 그는 "스리슬쩍 안하고, 못한다면서 구렁이 담넘듯 넘어가려던 전략"이 통하지 않음을 제법 속상해 했다. 이젠 체념하고 받아들였다.
그동안 그런 시간들이 쌓여서 이제는 제법 많은 일들을 뚝딱 잘 처리한다.
연세드신 아버님은 나이도 많으시고 윗세대시라 그러하기도 하지만 평생 제 손으로 식사를 차리거나 집안일을 하지 않으신다. 늘 어머님의 손을 빌어 모든 걸 해결하신다. 전혀 권위적이지도 군림하려 하거나 고압적인 분도 아닌 데 말이다.
자칫 남편도 그대로 두었다간 그리 나이들 것 같더라.
세상이 변한 만큼 이젠 버젓이 온전한 성인임에도 제 손으로 밥 한끼 못 차려 먹고, 입는 거, 먹는 거, 자는 거 모두 남의 손, 특히 아내, 엄마의 손을 빌어야만 하는 그런 아저씨들, 할아버지들은 요새 세상엔 제대로 "민폐"다. 그들도 앞으로 시대에 살아남으려면 배워야하고 변해야만 한다.
(늙어가며 고집이라도 안 세어야 덜 밉상인데 대체로 그 나이 들도록 "아내나 엄마, 가족을 도우려 하지 않거나 소소한 집안일조차 스스로 배우려 들지 않았던 만큼", 그들은 대체로 고집은 또 얼마나 세고, 변하려는 마음이 없고 마초정신이 투철한 지 가르쳐 볼 엄두도 안 나는 게다.)
사람은 늙어가며 꾸준한 자기성찰과 유연한 사고로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할 줄 알고, 최소한 스스로의 식사나 세탁, 간단한 집안일, 집안 관리 정도는 스스로 해내야 한다.
그래서 노년기 혼자 남을 시간도 대비해야 하지 않겠는가?
아내가 외출하면 돌아올 때까지 하루 종일 tv만 보며 굶고 있거나, 오랜만에 모임 나간 아내를 얼른 와서 밥차려라 닥달하는 노인이 되어선 안되지 않겠는가. 그리고 혹여 아내를 앞세운다면 그 다음은 자식에게 그리 해달라 할 것인가? 어림없는 일이다. 삶의 마지막 순간을 잠시 보살펴달라 부탁하는 거라면 몰라도.
평생 잡다한 일 다 뒷처리해줄 집사, 매니저, 비서 3종세트로 데리고 다닐 재벌2세도 아니라면 말이다.
그닥 열정적이지도 부지런하지도 않은 남편은
다행히도 "탈권위적이고 유순하다"는 강력한 장점을 갖고 있었다.
(나이차가 좀 나는 편인 우리 부부가 지금껏 아무렇지 않게 서로의 이름을 편하게 부를 수 있는 것도, 그간 이런저런 삶의 난관에도 다투는 일 없이 살아가는 것도 대부분은 유순한 남편 덕이다. 그의 탈권위적이고 무심하고도 유순한 성격 덕분이다. 물론 무심하고 유순한 그를 대신해 그간 일상 가정 살림 대부분의 문제, 육아를 책임져 온 나의 책임감과 노고도 상당했다.)
유순하고 탈권위적이기에 아이든 아내든 남편에게 '고쳐야 할 점'을 말해주면 성질내고 서운해하기 보단 "아 그런가?" 하고 바로 고쳐보려 노력하고, "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여 이해시키면" 몹쓸 고집을 부리는 일 없이 금세 수긍하고 받아들여 가르치기 쉬운 편이다.
(대신 가르칠 게 많고 손도 좀 많이 간다. 그는 중학교 졸업이후론 집을 떠나 고교-대학교-연구소-회사-공장 생활 내내 기숙사에서 주로 생활했고, 공부만 하고 일만 해온 공대 출신 순한 너드 느낌의 아재이기에 가르쳐야 할 게 좀 많다.)
소소하게는 아재식 언행하지 않기, 식사 습관, 상대에게 호감가는 옷차림과 자세부터 일상까지 나이든 아저씨는 변해가는 세상에 맞춰 열심히 배워가고 있다. 더불어 집안일도 하나둘 배워간다.
한가지 문제점은
생전 집안일이나 나의 행동에 간섭하거나 잔소리하지 않던 그가 집안일에 눈을 뜨면서 나에게 잔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빨래를 너는 방식부터 양말 뒤집어 벗어 놓지 마라. 기름기 묻은 그릇 겹치지 마라. 부터 딸기잼 너무 많이 바르지 마라 등의 자잘한 잔소리이 이어진다. 하~~~~
역시 아는 만큼 보이는 거였구나.
그동안 그가 내게 전혀 잔소리를 안 한 건 집안일에 관심이 없고 몰라서 그랬던 거다.
근데 내가 좀 억울하다.
내가 좀 그런 행동을 하기는 하는 데,
나는 평소에 아이나 남편에게 그런 류의 자잘한 잔소리를 얹지 않는 타입이라 조금 억울한 기분이 든다.
그럴 때 내가 자주 하는 대답은......
"우리 삶에서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게 몇 개나 되겠어. 이런 정도는 내 맘대로 하면 안 될까?"
라고 담담하게 답하면 그는 보통은 나의 대답에 조금 민망해 하며 그냥 넘어가주지만. 말이다.
요새는 키오스크를 비롯해 식당 주문도 그렇고, 까페에 가서도 주문도 늘 남편이 직접 하게 하고 의자정리, 뒷정리도 남편이 하도록 한다. 어디서든 매너 있는 중년 아저씨가 되도록 슬쩍슬쩍 조언해 준다.
생전 집안 일 안해 본 중년 아저씨들도 해보면 결국 잘만 하더라.
뭐든 자꾸 해야 잘 하고 그리고 해버릇 해야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인줄 안다.
여긴 작년 초 이사온 우리 집 팬트리.
이전 거주하시던 세입자분께서 정말 커다란 양문형 냉장고만한 김치냉장고를 이곳에 두고 썼더라. 이 공간이 거진 꽉 찰 대형 냉장고를 넣다보니, 어쩔 수 없이 팬트리 선반을 다 떼내었나 본데, 그 선반들을 구석에 아무렇게나 내팽개치듯 그대로 방치하고 가셨더라. ("하~~ 성미 안 맞아. ㅡ..ㅡ")
남편이 그 선반들을 하나하나 다 닦고 다시 설치했다. 남은 분량은 내가 펜트리 상단에 차곡차곡 각 맞춰 쌓았지.
(저 선반 설치도 처음해보면 어렵다. 설명서를 본다고 그림처럼 척척 되지는 않는다. 거의 대부분의 직장생활을 배터리를 개발하는 연구소나 공장에서 일해 온 그에겐 이런 걸 조립하거나 만지는 데 영 능숙치 않다. 그는 꽤 여러번의 시행착오를 거쳐 스스로 익혀 설치했다. 그리곤 무척 기뻐했다.)
이 집 펜트리는 넓지도 않지만 좁지도 않아서 이런저런 잔살림 넣기에 딱 좋았다.
(이전에 잠시 살던 집은 펜트리, 베란다 등 여유공간이 전혀 없는 좁은 오피스텔이라 별거 아닌 이런 펜트리가 너무 반가웠다.)
이삿짐 견적 2톤 받을 만큼 짐이 없는 집인데도 가지고 있어야 할 살림들은 저리 많다.
토토로 저 녀석은 아무래도 프로그래밍된 소프트웨어가 고양이가 아닌 개가 아닐까 싶다.
사방을 다 킁킁거리고 냄새맡고 간섭하고 다닌다.
남편은 이제 고양이들 밥을 주거나 화장실을 치우는 일도 전담하여 잘 한다. 처음엔 화장실 치우는 일도 잘 하지 못해 어쩔 줄 몰라했지만 이젠 선수가 되었다. 내가 치우는 방식이 맞지 않다며 싫어한다.
이래서 주방엔 주부가 둘이면 안 된다고 하나 보다. 화장실 치우는 사람도 둘이면 안 되나 보다.
(그나마 주방에선 역할을 나눠 내가 주로 요리를 하고, 밥을 하거나 재료 준비나 뒷정리 같은 건 주로 남편이 하는 편이다.)
지난 4년간 반복된 3번의 이사.
그러다보니 이제 남편은 저런 선반 설치, 블라인드 시공, 가구 조립 쯤은 (원래는 꽤 둔한 막손임에도) 이젠 금손 비스무레하게 척척 해낸다.
젊을 땐 어지간하면 내가 다 알아서 직접 해내거나 업체를 알아봐서 처리했지만, 나이들며 남편씨의 자립정신을 키워주기 위해 직접 하도록 시킨다.
이젠 이 집 아저씨는 식당가서 혼밥도 아무렇지않게 잘하고, 혼자서 마트가서 장도 잘 봐오고, 우체국 택배도 척척 부치고 세탁소에 수선도 잘 맡긴다. 거기다 전자제품 AS 접수신청도 잘하고, 이런저런 잡다한 집안일도 점점 능숙하게 잘 한다.
사람 상대하고 아쉬운 소리도 좀 해야 하는 관리사무소 일처리, 관공서, 은행 일도 잘 보고 기차, 버스 예매도 잘 하고 대중교통도 잘 탄다.
(그간 수십년간 자차만 몰고 다니고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았던 사람에겐 이것도 처음엔 배워야 하는 일이더라. 그는 요새 직접 운전하는 대신 기차를 타고 대전을 다니는 편리함과 쾌적함에 빠져들었다. 왕복 4시간 가까이 순간순간 도로 상황에 신경쓰며 운전하지 않고 기차에 앉아 인터넷 검색도 하고 잠시 잠도 자며 오가는 매력에 빠져 기꺼이 기차도 타고 지하철도 타며 대전 부모님을 만나뵈러 간다.)
그게 뭐 별거야..... 싶지만, 우리나라 중년 아저씨들에겐 그게 별 거라더라.
(우리집 아저씨와 같은) 꽤 많은 대졸 사무직, 연구직으로 늙어가는 아저씨들.
평생 아내나 다른 사람들이 잡다한 일 다 처리해주고 본인은 회사만 다니다 보니, 중늙은이가 되어서도 제대로 은행 볼 일도 못 보고 일상 쇼핑, 대중교통도 예매하거나 타는 방법, 비용 등을 잘 몰라서 은퇴하면 늙은 할아버지가 아닌 중년임에도 할 줄 아는 게 없어서 그저 와이프 뒤만 따라다니며 의지해야 하거나, 어린 아이들처럼 사회 생활을 하나하나 다시 배워야 한다고 하더라.
그래서 모 대기업 은퇴 프로그램엔 그런 소소한 사회생활 적응 내용이 실제 메뉴얼에 들어있다고 들었다.
그런 꼴 보기 싫어서 몇년 전부터 일상문제 해결은 혼자 뭐든 다 해보게 하는 중.
두고 보자면 첨엔 속터지는 수준이었지만, 시나브로 늘어서 이젠 제법 척척 잘한다.
이제는 새로운 가전제품들 오면 인터넷에서 모델명 검색해서 사용설명서 따로 다운 받아 혼자서 이래저래 손질도 할 줄 알고, 혼자서 고양이들 데리고 동물병원가서 상담도 받고 복잡다단한 일처리도 한다.
이사와서 새로 바꿔야 할 병원 (그것도 예약검진 시스템이 다소 복잡한) 종합병원도 혼자서 검진 예약, 상담도 척척하고 대중교통 타고 병원에 다녀오고, 이런저런 예매도 이제는 제법 잘 한다.
요샌 슬슬 간단한 요리에도 도전한다.
오늘은 남편 혼자서 아욱콩나물 된장국을 끓였다.
어제 대전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기차에서 내가 알려준 레시피대로 끓였다. 나는 옆에서 채소를 씻어주거나 간단한 보조를 해 주며 남편의 질문에 간단히 답을 해 줄 뿐 잔소리나 간섭은 전혀 안 한다.
뭔가 새로운 걸 도전하고 배워가는 이들의 어수룩함에는
애든 어른에게든 매우 너그러워 잔소리를 전혀 안하는 게 나의 장점이다.
서투르거나 일을 그르쳐도 그다지 화가 안 난다.
저럴 수 있지 싶어서 같이 정리하고 치워줄 망정 소리지르거나 화내지 않는다.
이런 과정 속에서 남편씨는 나름의 속도로 점점 더 진화할거라 믿는다.
내 적어도 그대를
"혼자서 일상 생활할 줄 모르고 주변에 폐끼치고 끊임없이 돌봐주어야 하며, 젊은 이들에게 혐오감 주는 지저분한 꼰대 할아버지"로 늙어가게 두진 않으리라.
그저 애나 어른이나 혼자 놔멕여 버릇해야 자립한다.
아이는 기숙사에서 살지만 그래도 종종 닭볶음탕이나 된장찌개같은 걸 끓여보기도 한다. 채소를 손질하거나 요리 후 뒷정리하는 걸 가르쳐 주기도 한다.
그래서 요샌 몇년 뒤 기숙사에서 나와 독립해야 할 아들에게 주고 싶은 살림들을 조금씩 모아가는 중이다.
시집갈 딸을 위해 야금야금 이쁜 살림을 장만해 둔다던 엄마들의 맘이 이해된다.
아들이라도 독립해야 할 테니 그때 자신의 주방을 꾸려갈 수 있도록 아들의 이름이 각인된 근사한 원목 도마를 맞춰두거나 내가 써보니 유난히 맘에 든 스텐 주방칼이나 가위, 커트러리를 미리 좀더 여유있게 챙겨서 따로 보관하는 중.
이런 데서도 부모의 사랑과 정성을 느끼길 바라는 맘을 담아서.
다음 번엔 아이의 독립을 위해 소소하게 모아가는 살림들을 한번 정리해 봐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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