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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흥동 성당에 가보기로 맘 먹었다.

매일 걷습니다 2024. 12. 25. 21:26


나이들면 새로운 사회생활의 연장으로 생활종교를 가져보기로 맘 먹었다.  

이왕이면 다른 종교보단 남편과 성당에 다니자고 약속했는데. 그 과정은, 별건 아니다.
남편은 과거 개신교 신자였으나 스스로  믿음에 의문이 생겨 그만 두었고 다시 종교를 갖는다면 불교에 입문해보고 싶어했다.

그러나 내가 산 속에 있는 이름난 절 찾아 다니려면 매번 힘들고 이래저래  춥고 덥다고 이왕이면 집에서 가깝고 걸어다닐 만한 도심 안에 있는 종교시설로 다니자고 설득했지.


첫째 이유는 그나마 성당이 내겐 친숙해서
어쩌다보니 조선 후반기 조상들부터 할머니대에 이르기까지 집안 대대로 서학, 천주교를 믿다 멸문지화 수준의 화를 당하고 시골로 숨어들었다던 아무튼 그런 집안의 후손이다.적어도 족보상으로는 그러하다. 그 집안 족보 항렬에 맞는 돌림자도 받아 이름 지었다.
(어쩌면 조선후기나 이어진 일제강점기 등 혼란스러운 시기에  그 족보를 구매한 건지는 모르겠다만, 아무튼 할머니대까지 대대로 쭉 이어 성당을 다닌 건 맞다.)

이런 내력보다는 조상분들이 강직하시어 독립운동을 하셨다거나 학자로 살아가셨다거나 뭐 그런 내력이 부러워 뵈지.

그 윗대 사연까진 모르겠고 증조부께서 땅을 많이 가진터라 막내셨던 할아버지도 꽤 많은 논밭을 물려받은 부농이셨단다. 그러나 그는 일찍부터 도박에 빠져 가산탕진한 놀음꾼으로 생을 일찍 마감하셨다고 들어서 별로야.

(외가는 꽤 큰 재산을 큰 아들에게만 물려주어서 이후 그 자식들끼리 수년간 법정다툼으로 이어진 재산싸움을 오래 했다고 전해들었고, 아무튼 우리집과는 상관없는 일로 결론났다.
난 가난하게 살더라도 그런 개싸움으로 생겨난 돈은 관심도 없고 받지도 않겠다고 진즉 선언했고 외가와의 연도 끝났다.
그래서 나는 친척 많은거 형제 많은 거 다 별로다. 별로 좋은 꼴을 못 보겠던데. 이집을 들여다보나 저집을 들여다보나. 없으면 없는대로 서로 지긋지긋해하고, 있으면 있는 대로 개싸움나고)

그리하여 할머니 그리고 당시 그래도 고등학교까지 졸업한 맏자식 큰아버지가
할아버지 사후 어린 동생들 건사하느라 그 동생들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가르치느라 고생 많이 하셨다고 해. 

결국 친가쪽 할머니와 할아버지께서 두분 다 집 밖에서 돌아가셨다.
할아버지는 마지막까지도 놀음방에서 놀음하고 술먹고 겨울날 길거리에서 쓰러졌고, 할머니는 힘겹게 한여름에 밭일하다 심장마비로 쓰러지셨다. 그 내용이 너무도 다르지. 
 
하여간 옛날 할아버지같은 남자들 좀 많이 별로야.
성실하고 가족 생각하며 조신하게 좀 살면 안 되나 싶지. 본인의 행각으로 남은 가족의 삶이 이후로도 오래오래 피폐해짐을 어찌 그리 모르는 지.


하긴 남편의 아버지께서도 그러했다.
수더분하시고 맘이 나쁜 사람이야 아니셨다만 젊어서부터 어머님 입장에서 보자면, 자식들은 이뻐한다만 어머님께는 제멋대로 구는 남편이랬다.

10년이 넘어선 항암치료 막판에 이르자,
(의보되는 치료가 더이상 안들어 아주 비싼 비급여치료들을 받을 지 결정해야 할 당시)  

'오랜 세월 암투병하신 아버님 병간호 하시다 혼자 남아야할' 어머님을 위해서라도,
지나치게 비싼 치료비에 비해 효과는 확실치 않다는 비급여 치료들은 더이상 받지 말자, 그리고 당신 몸에도 버거운 힘든 항암 치료보다는 통증 치료 위주로 가자고 남편이 아버님을 설득했을 때,

"내가
번 돈이니 내가 다 쓰고 가겠다."고 어머님을 위해 왜 돈을 남겨야 하냐며 화내셨다지.
돈은 자신이 벌었으니 모두 자신의 몫이지. "남은 삶을 살아갈 어머님을 위한 몫"이 아니라 하셨다지.

그리고 덧붙여 어머님께 나중에 들어갈 비용이 필요하다면 그건 니들이 알아서 할 일이니 자신에게 말할 게 아니라며 역정내셨다.

(어머님께서 아버님이 하신 말씀들을 전해들으시면 너무 서운하실 거 같아 남편은 전하지 않았다고 했다. 잘 하셨소. 세상엔 때론 진실을 차라리 모를 때가 더 나은 경우도 많지 않소.)


그때는 아버님이 당신 몸이 아프셔서, 생에 대한 애착이 남다르신데다, 당장의 내 생명이 아내의 남은 삶보다 더 귀하다 여겨 그러시려니 이해했다만.

(젊어서부터 자식들은 이뻐해도 평소 아내인 어머님께는 정작 평소 자장면 한그릇도 잘 안 사주려 하셨다던 아버님에 대해) 어머님이 여러번 자신에게 유난히 야박한 배우자에게 서운하다며 옛날 일들을 수차 말씀하실 땐,
"음, 자장면조차 안 사준다라.....저건 뭐지? 아버님 나름의 조크같은 건가? 그냥 아버님이 과하게 알뜰하신가? 좀 특이하고 재밌는 양반이시네." 정도로만 여겼다.

그러나 "평생을 함께 했고 끝을 지켜줄 배우자"에 대한 그 옹색한 마음씀씀이가 인생 막판에도 그대로 드러나니, 전체적 상황을 "관찰자로서 지켜본" 내 입장에선 인간적으로 많이 아쉽더라.
무엇보다 배우자로부터 그리 대우 받으시는 어머니가 안스러웠지. 

결국 그렇게 억지스런 항암치료를 이어가다 항암치료제를 투여하기 위해 시술받은 케모포트가 터져버렸고 그대로 중환자실에 한달쯤 누워 계시며 상당한 돈을 쓰고서야 무의미한 항암치료도 결국 끝났다.
정확힌 당신께선 그 상황에서도 값비싼 항암치료를 계속하길 원하셨지만 담당의사가 더이상은 의미도 없고 할 수도 없다며 포기했다.  


아무튼 그래서 나는  옛날 노름꾼 우리 할아버지부터, 남자에게만 재산 물려줘 개싸움 일으킨 외할아버지도 그렇고, 평생 곁을 지킨 어머님께 생애 끝까지 야박하게 대한 아버님도 아무튼 옛날 남자들 대체로 참 별로야.


둘째는 Catholic 말 그대로 🐈 😻 🐈‍⬛️ 😺 🐱 😸 홀릭이잖아. 난 고양이러버.

셋째는 내향형인 우리 부부의 성격상 훅 다가오는 교회는 부담스러워. 적당히 우리가 오등가 말등가 내비두는 데가 좋아.



드디어 꼭 가보고 싶은 성당을 찾았어.


우리집에서 그리 멀지도 않아. 걸어도 갈만한 성당이다.

성심당 본점 길건너에 있는 대흥동 성당이다.

성심당 근처를 다니다보면 갑자기 은은하고 맑은 큰 종소리가 울릴 때가 있는데 바로 대흥동 성당 종탑에서 직접 치는 종소리이다. (기계음은 아닌데 사람이 아닌 기계 망치가 종을 친다고 들었다.)

종소리와 함께 갑자기 그 번화가가 한번에 성스러워지는 묘한 분위기가 돌지.

https://youtu.be/aEUgtU_HBRg?si=p19cLoM0BCID4XkZ